2020 여기 타임캡슐에 담다

도심의 변신은 무죄… 을지로는 더이상 공구거리가 아니다

2020.05.19 김민정 기자

2020년 한국 사회에는 복고 바람이 불고 있다. 단순히 수십 년 전의 스타일을 다시 꺼내 든 게 아니다. 이전에 유행했던 디자인이나 건축 양식 등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뉴트로(새로움을 뜻하는 영단어 new와 복고를 뜻하는 retro의 합성어)’가 중심에 있다. 수십 년 전 처음 출시됐던 때와 비슷하게 생긴 용기에 담은 음료수, 한옥 건물에 들어선 빵집, 활동하기 편하게 개량한 생활한복 등이 뉴트로 열풍의 예다.

뉴트로의 인기와 함께 새롭게 조명받는 지역도 있다. 오래된 공구상을 비롯해 노포(老鋪·대를 이어 운영하는 오래된 가게) 식당들이 현대식 건물들과 공존하는 구도심, 서울 종로와 을지로 일대가 대표적이다. 낡은 것은 부수고 다시 짓던 개발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옛것과 새로운 것을 조화시키는 쪽으로 변화하는 사회 분위기가 잘 반영된 결과다. 뉴트로 열풍에 올라탄 2020년 도심의 모습을 기록한다.

을지로는 골목마다 인쇄소, 공구상, 조명가게가 들어서 있는 만물상 같은 거리다. 을지로 3·4가 인근에는 노가리 골목, 호프 거리 등 다양한 노포들이 몰려있다. 을지로의 대표적인 노포 을지면옥 주변엔 손님들이 대를 이어 찾는 양미옥, 조선옥 같은 오래된 가게들이 세월의 더께를 입은 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포, 을지면옥

서울 중구 을지로의 대표 노포 중 한 곳인 평양냉면 전문점 을지면옥 입구 /유한빛 기자

노포, 조선옥

서울 중구 을지로의 노포 중 한 곳인 갈비 전문점 조선옥 입구 /김민정 기자

자연스럽게 주요 고객층도 대학생, 사회초년생 시절 이곳을 찾던 중장년층이었다. 하지만 2020년에는 이런 을지로 일대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오래된 가게와 골목길이 모인 을지로 상권이 복고 바람과 맞물려 젊은층에게는 새로운 문화 콘텐츠가 됐기 때문이다.

젊은 감각에 맞춘 카페와 펍, 복합문화공간 등도 인쇄소와 공구상가 골목 사이 사이에 속속 들어서, 젊은이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힙지로, 커피한약방

가게 안팎을 옛날 느낌으로 꾸민 카페인 '커피 한약방’의 입구 /김연정 객원기자

힙지로, 창화루

2019년에 문을 연 중식 주점 창화루는 1980년대풍으로 가게를 꾸몄다 /김연정 객원기자

그동안 활발한 상권에는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를 뜻하는 ‘핫플레이스’란 이름표가 붙었다. 요즘 젊은층 사이에서 새로운 유행은 잘 알려져 있고 누구나 가는 핫플레이스가 아닌 개성 있고 세련된 ‘힙(hip)플레이스’로 숨겨진 가게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데이트나 모임 장소로 이 일대를 찾는 20·30대가 늘면서 을지로는 ‘힙지로’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을지로3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을지로 상권은 노후 지역이던 인쇄소 골목 특유의 낡은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옛 소품과 인테리어를 유지한 식당, 와인바, 카페도 속속 들어섰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는 좁은 골목길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가게들은 대부분 간판도 없다. 손님들은 소셜미디어에 후기를 올리고 공유하면서 찾아온다.

을지로 상권의 재부상은 숫자로도 나타난다. 상가정보연구소가 SK텔레콤 빅데이터 서비스 플랫폼 지오비전 통계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9월 기준 을지로3가의 일 평균 유동인구는 6만2000여명에 달한다. 이 기간 을지로3가 상권도 두드러지게 활기를 띠었다. 상가정보연구소가 을지로3가 일대 주점의 매출을 추정한 결과 지난해 9월 기준 점포당 평균 5767만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을지로3가 상권이 속한 서울 중구 주점 평균(1897만원)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을지로 노가리골목과 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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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20년 봄, 이 골목의 분위기는 갑자기 차분해졌다. 호프집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단골들과 새로 유입된 젊은 고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노가리 골목도 코로나19의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넘치는 손님을 맞기 위해 길 한가운데까지 테이블이 차려지던 지난해 가을의 모습과 코로나19가 아직 끝나지 않아 대규모 회식이나 모임이 줄어든 2020년 5월의 풍경이 대조된다.

떠오르는 오피스 타운, 금융사도 ‘을지로 시대’ 개막

을지로·청계천 일대가 언제까지나 오래된 거리로 남는 것은 아니다. 2020년 을지로는 ‘옛것이 새것을 만나는 현장’ 그 자체다. 도심정비사업으로 신축 사무용 건물들이 잇따라 들어서고 대기업과 스타트업 등이 둥지를 틀면서 활기가 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우건설은 10여 년의 광화문 생활을 마무리하고 을지로에 있는 ‘을지트윈타워’로 이전했다. 대우건설과 BC카드, KT계열사 등이 을지로4가역 인근 을지트윈타워로 이전하면서 약 2500여명의 직원들이 입주했다. 전체면적 14만6655㎡ 규모의 을지트윈타워는 초대형 오피스 건물로 도심권(CBD) 오피스 중 세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파인애비뉴

신한카드가 본사로 사용 중인 서울 을지로2가의 대형 오피스 빌딩 파인애비뉴 /장련성 기자

을지트윈타워

서울 중구 을지로 을지트윈타워 전경 /유한빛 기자

IBK파이낸스타워

서울 중구 을지로 2가 IBK파이낸스타워 /김민정 기자

대신파이낸스센터

서울 중구 삼일대로 대신파이낸스센터 /김민정 기자

한화빌딩

서울시 중구 장교동 한화빌딩 전경 /한화건설 제공

을지로 장교동 일대에는 2~3년 전부터 은행·증권·보험·카드 등 금융사들이 새로 사옥을 짓고 이전해왔다. 2016년부터 신한L타워(신한생명), IBK파이낸스타워(IBK기업은행), 대신파이낸스센터(대신금융그룹), KEB하나은행 사옥 등 지상 20층 이상 규모의 새 건물이 곳곳에 들어섰다.

이는 2010년 서울시가 을지로2가 일대를 금융산업 활성화를 위한 ‘금융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한 이후 추진되던 재개발 사업들이 속속 완성된 결과다. 당시 서울시는 금융 보험 은행 등 금융사들을 을지로 일대로 끌어모아 집적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시는 이곳에 금융 용도의 업무시설을 지을 경우 상한 용적률을 기존 1000%에서 1200%까지 높여줬다.

새 옷 갈아입는 세운지구

서울 종묘의 남쪽 종로에서 청계천과 을지로를 가로지르는 옛 세운상가 일대에는 재개발 사업이 추진된 지 14년 만에 새 아파트 ‘힐스테이트 세운’이 들어선다. 뒤이어 대우건설도 줄줄이 분양을 준비 중이다.

세운재정비사업은 전체 개발면적이 43만8585㎡에 달하는 서울 도심 최대 재개발사업이다. 종로, 청계천, 을지로에 걸친 세운지구 일대는 중심업무지구의 편리성과 풍부한 생활·문화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실수요자와 투자자가 모두 관심을 두는 곳이지만, 지금까지 개발이 제한돼 주택 공급은 지지부진했다.

오래된 상점들

대림상가 1층은 오래된 전자기기 판매점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유한빛 기자

새로운 상점들

대림상가 2층은 복고풍 식당과 공방이 문을 열면서 젊은이들로 붐빈다 /유한빛 기자

서울시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으로 영업기반을 잃게 된 세입자들에게 공공임대상가 700곳을 제공한다. 공공임대상가는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임대료로 입주할 수 있도록 해 젠트리피케이션(도심 인근의 낙후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외부인과 돈이 유입되고, 임대료 상승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정비 기간 동안 일부 구역에는 임시 영업장도 마련된다.

옛것과 새것이 부딪히면서 갈등도 벌어지고 있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땅에 서울시의 개발 계획까지 오락가락하니 편할 날이 없다. 을지면옥을 보존할지를 두고 생긴 논란이 대표적이다. 도시 정비의 역사가 갈등의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모두를 만족하는 답은 애초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세운지구 재개발 사업의 명암

재개발 사업에 반발하는 지역 상인들이 내건 플래카드를 을지로 골목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유한빛 기자

서울시에 따르면 2022년 4월 기준 서울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내 일몰 시점이 지난 정비구역 152곳 중 절반 가까이 되는 63곳이 ‘조건부 연장’돼 개발 가능성이 다시 열리게 됐다. 애초 시는 일몰 대상은 모두 정비구역에서 해제하고 관(官) 주도 방식의 도시재생활성화사업을 추진하려 했지만, 이 계획도 다시 바뀌게 된 셈이다.

특히 을지로 유명 노포 중 하나인 조선옥이 속한 3-8구역도 이번에 구역 지정 연장으로 인해 개발이 가능해져 철거냐 보존이냐의 논란이 재점화될 전망이다. ‘노포 보존’을 둘러싼 동상이몽(同床異夢)은 곳곳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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