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낳고 자동차가 키운 이곳… 군산의 미래는 새만금으로 흐른다

2020.11.09 유병훈 기자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시가지)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군산이 낳은 작가 채만식은 고향의 모습을 소설 ‘탁류’의 첫머리에 이렇게 묘사했다. 바다와 평야가 만나는 땅에서 금강과 바다가 뒤섞이는 물길처럼, 군산에서는 사람도 시간도 한데 섞인다.

170가구의 어촌, 쌀이 모이는 국제도시로 크다

군산항이 개항한 해인 1899년만 해도 군산의 인구는 모두 170가구, 588명에 불과했다. 갈대밭에 둘러싸인 한미한 어촌이 항구도시로 급성장한 계기는 일제 강점기에 마련됐다.

풍요로운 호남평야와 충남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출구가 필요했던 일제는 군산항 일대를 개항장(開港場)으로 지정했다. 외국인이 왕래하고 무역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용한 지역이란 뜻이다. 1909년 조선총독부 조사에서 군산항의 전체 수출액 중 95%가 쌀이었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쌀 반출’이라는 목적 아래 근대 군산은 철저하게 항만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된다. 군산항까지 쌀을 옮기기 위한 철도가 들어섰고, 효율적인 수탈을 위해 세관과 은행이 지어졌다. 조선의 식량 생산은 동아시아의 열강을 꿈꾸던 일제의 국가 대전략과 직결됐기에 군산의 중요성도 커졌다. 을사늑약 직후인 1910년 일본은 조선총독부령 제7호를 통해 12개의 도시지역을 부(府)로 지정했는데, 군산은 최초 12개 부의 하나로 이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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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

장미동 일대 군산내항. /곽재순 PD

군산내항 인근 일본식 건축물들

일제시대에는 은행과 무역회사 등으로 쓰이던 건물들이나 현재는 카페와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다. /곽재순 PD

그 결과 군산항의 무역액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개항 당시 1만2000원이던 군산항의 수출·입액은 1934년 7400여만원으로 6000배 넘게 증가했다. 같은 해 조선에서 생산된 쌀 1672만석 중 300만석 이상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에 일제가 출간한 ‘군산개항사’에는 “세관 옥상에도, 부두에도, 도로에도 눈길 가는 곳마다 도처에 수백 가마씩 쌓여 20만 쌀가마니가 정렬하였으니···오호 장하다! 군산의 쌀이여!”라는 구절이 등장할 정도다.

쌀이 모이자 사람도 모여들었다. 군산 인구는 1944년 58000여명이 됐다. 588명의 인구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100배가 됐다.

경제와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군산은 국제도시의 면모도 띄기 시작했다. 한국인 외에도 일본인 대지주와 관료들,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들이 쌀을 따라 군산으로 향했다.

1899년~1944년 군산 인구 수 추이

색이 진한 막대 그래프를 눌러보세요
자료: 국가통계포털, 군산시(1944년은 추정치), 단위: 명

오늘날 군산의 다채로운 건축물과 식문화에서도 이 같은 역사의 흔적이 발견된다. 군산의 명물 빵집인 ‘이성당’에서는 근대 일본인들의 빵 문화를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명물인 ‘짬뽕’은 과거 군산에 정착한 화교들이 남긴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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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가옥

신흥동 일본식 가옥 전경 /곽재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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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가옥

신흥동 일본식 가옥 내부 석조등 /곽재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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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당

화교가 창업한 중국요리 식당 빈해원 내부 /곽재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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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당

화교가 창업한 중국요리 식당 빈해원 내부 /곽재순 PD

수탈항에서 산업도시로…남으로 동으로 뻗어나가는 군산

미곡항(米穀港)으로 번성하던 군산의 위상은 광복 이후 한국이 본격적으로 산업화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농업을 대신해 국가기간산업이 된 제조업 단지는 수도권과 영남권에 집중됐고, 인천항과 부산항이 주축 물동항으로 입지를 굳혔다. 무역항으로서의 군산항에 의지했던 군산 경제는 긴 침체에 빠진다.

그나마 호남 지역의 대동맥 역할을 하던 국가철도 호남선 역시 군산이 아닌 이리(현재 익산)를 경유했다. 군산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으나 1984년에 이르러서야 김제나 정읍 같은 전통적 농업 도시의 인구를 추월했다. 이마저도 1991년부터는 다시 감소세에 접어들면서 이리시에 역전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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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응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군산국가산업단지 전망. /곽재순 PD

위기의 군산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1988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조성된 군산 국가산업단지와 군산2국가산업단지다. 대우자동차 공장, 현대중공업 조선소, OCI 공장 등 중화학공업 대기업들이 산업단지에 입주하면서 군산의 경제가 살아났다.

산단을 조성하면서 군산시도 물리적인 확장을 시작했다. 1995년에는 옥구군을 통합해 단숨에 호남지역 인구 3위의 도시로 뛰어올랐다. 2004년부터는 시의 남부인 수송동·지곡동·미장동 일대에 수송지구 택지개발 사업이 시작됐다. 신도심의 한가운데 위치한 수송동은 현재 군산의 최대 주거·소비 중심지다.

2015년부터는 대규모 복합도시인 ‘디 오션시티’ 개발 사업이 진행 중이다. 2021년에는 973가구의 더샵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군산역이 있는 군산 동북부 내흥동에도 모두 6697가구가 입주할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인 ‘군산역세권 택지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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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사업

복합도시 ‘디 오션시티’의 아파트 건설 현장. /곽재순PD

공동화 현상이 심각했던 군산 내항 구도심도 2009년부터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했다. 일제시대 건축물들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재단장해 관광 상품화한 것이다. 흉물로 남을 뻔했던 일제시대 당시의 건축물과 인근 가옥·상가들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로 거듭났다.

연이어 터진 현대중공업·GM대우 악재··· 또 한 번 내리막길 맞나

산업도시로 변모하던 군산 경제는 또다시 위기와 마주했다. 군산 경제를 지탱해온 제조업 경기가 침체에 빠졌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 7월 아시아 최대의 크레인 타워를 보유했던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가동을 중단한 데 이어, 2018년에는 한국GM이 군산 자동차 공장을 폐쇄했다. 2011년 기준 두 공장의 연간 생산액은 6조2000억원으로, 군산 지역 총생산액의 68%를 차지했다. 군산시는 현대중공업과 한국GM이 공장을 철수한 결과 두 회사의 협력업체를 포함해 일자리 2만여개가 사라진 것으로 추산했다.

기사 이미지 가동이 중단된 현대중공업 조선소. /곽재순 PD

충격파는 군산의 경제지표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상반기 군산의 실업률은 4.1%로, 2017년 실업률 1.5%의 3배 가까이 올랐다. 군산 지역 소규모 상가의 공실률은 2017년 1분기 9.2%에서 2018년 4분기 25.1%까지 치솟았다.

2017~2020년 군산지역 소규모 상가 공실률

2017~2018년 통계, 2019년 통계, 2020년 통계는 표본의 차이가 있음
자료: 한국감정원

문장을 눌러서 관련기사를 확인해 보세요2020년에도 악재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OCI는 태양광용 폴리실리콘을 생산하던 군산공장의 일부 라인을 중단하고,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 나섰다. OCI 근로자 1100여명과 협력업체 직원 350여명이 영향권에 들었다.

군산시는 고용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군산형 일자리’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중소기업과 노동자가 주축이 돼 원·하청과 지역을 모두 살리는 상생형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광주형 일자리와 구미형 일자리가 대기업 중심의 고용실험이라면, 군산은 대기업 공장들이 가동 중지·폐쇄한 충격을 반영해 중소기업에 방점을 뒀다. 시는 또 신재생에너지와 미래 자동차 산업을 새로운 먹거리로 선정하고 전략적으로 육성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군산의 굽이치는 물결은 새만금으로 흐른다

다시금 비상(飛上)을 준비하는 군산의 또 다른 날개는 단군 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으로 불리는 새만금이다.

새만금 간척 사업은 만경강과 동진강의 하구를 방조제로 막아 토지 291㎢와 담수호 면적 118㎢ 등 모두 409㎢ 크기인 부지로 조성하는 사업이다. 만경평야와 김제평야의 앞글자를 각각 따고, 새롭다는 의미를 더해 ‘새만금’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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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간척사업

위성으로 촬영한 새만금 간척지의 변화 /새만금개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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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이용계획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409㎢ 부지가 조성된다. /새만금개발청

총길이 33.9㎞로 세계에서 가장 긴 새만금 방조제는 지난 1991년 11월 착공해 지난 2009년에야 완공됐다. 새만금 부지의 활용 계획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여러 차례 수정됐다. 초기 계획상으로는 간척지를 100% 농지로 활용할 예정이었지만, 2007년 농업용지의 비율을 72%로 낮췄다. 이후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아예 30%대로 줄였다.

새만금 산업단지 /새만금개발청 제공, 편집=곽재순 PD

바뀐 기본계획에 따르면 나머지 70%의 부지는 산업·연구용지, 국제협력용지, 관광·레저용지, 배후도시용지, 환경생태용지 등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새만금 일대 개발 사업이 완성되면 대한민국 서남부에 군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초대형 경제권이 들어서게 된다. 새만금 개발부지에 공항을 건설하는 사업도 검토 중이다.

다만 그 시기는 아직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새만금 기본계획’에 따르면 매립과 부지 조성 등이 포함된 1단계 사업은 2020년 말 마무리될 예정이다. 다만 간척지 매립 작업의 진행률은 2019년 말 기준으로 12%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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