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밤바다의 찬란한 불빛 뒤에는 묵묵히 돌아가는 공장이 있었다

2020.11.11 허지윤 기자

2020년 9월 23일. 서울 용산역에서 고속열차(KTX)를 타고 3시간 만에 전라남도 여수엑스포역에 도착했다. 예년 같았으면 가을철 관광객으로 붐빌 역사(驛舍) 안에도, 바깥 거리에도 서울과 달리 사람들이 드물었다. 여수의 첫인상은 다소 고즈넉했다.

해가 저물면 차분한 해안 도시 같은 여수의 인상은 180도 달라진다. 이순신광장에서 종포해양공원을 잇는 해변 산책로를 중심으로 빨간 천막과 플라스틱 의자로 단출하게 꾸민 포장마차들이 속속 손님을 맞기 시작한다.

기사 이미지
여수 밤바다

2020년 여수 포장마차 거리의 전경. /허지윤 기자

주변 점포의 네온사인과 가로등에 불이 켜지는 가운데 오가는 인파도 늘기 시작한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도, 퇴근길에 들른 듯한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하는 나이 지긋한 관광객들도 한 마음이 되어 ‘여수 밤바다’를 즐기는 시간이다.

여수 하멜등대의 낮과 밤

슬라이더를 좌우로 드래그해 여수의 낮과 밤을 비교해 보세요

전라남도의 작은 항구도시 여수는 어떻게 2020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밤바다의 도시가 된 것일까.

국내 최대 석화산업도시 여수

여수는 전라남도를 지탱하는 주요 경제권 중 한 곳이다. 전라남도 수출정보망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전남 수출 1위 도시가 여수다. 전체 수출액의 77.4%를 차지했다. 이런 여수의 경제를 대표하는 것은 석유·화학산업이다. 한 해 수출액의 절반을 석화제품이 차지한다.

여수가 전남을 대표하는 제조업 도시로 성장할 기반이 만들어진 때는 1973년, 울산에 이어 제2석유화학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다. 관리면적만 3171만1000㎡에 이르는 대규모 석화 산업시설이 조성됐다.

2020년 현재 GS칼텍스·롯데케미칼·금호석유화학·남해화학·여천NCC 등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이 이곳에 몰려있다.

여수상공회의소 집계에 따르면 2018년 말 기준으로 여수국가산업단지 생산액은 836000억원, 고용인원은 22175명에 달한다.

기사 이미지
2019년 12월 여수국가산업단지 전경. /조선일보DB

산업단지가 자리한 삼일동 일대 역시 여수 밤바다의 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야간에 가동되는 생산 설비들을 비추는 불빛이 광양만 일대를 밝힐 정도다.

문장을 눌러서 관련기사를 확인해 보세요 여수 경제의 심장인 이곳도 최근 진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전라남도와 여수시는 오는 2021년부터 4년에 걸쳐 2조1900억원을 투입해 여수 산단의 업무 환경을 개선하는 42개 사업을 진행한다. 오래된 공장의 제조 공정을 자동화해 스마트 공장으로 바꾸는 등 산업단지 전반을 디지털 환경에 맞춰 개선하는 계획이다.

노래 ‘여수 밤바다’가 만든 낭만도시

이순신광장에서 종포해양공원을 잇는 1.5km 길이 해변 산책로를 따라 공연 공간과 놀이터, 포장마차 거리가 조성돼 있다. 해질녘부터 모여든 관광객과 지역 주민들은 이곳에서 바닷바람을 쐬며 운동을 하거나 음식을 먹으며 야경을 즐긴다.

기사 이미지
여수 밤바다

밤바다와 해상케이블카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종포해양공원 산책로. /허지윤 기자

기사 이미지
포장마차 거리

여수의 인기 관광지인 낭만포차 거리의 가게들. /허지윤 기자

이순신광장부터 하멜전시관까지 이어지는 낭만포차거리는 여수시가 낙후된 원도심을 살리기 위해 종화동 구항(舊港)을 정비해 조성했다. 사업비 314억원을 들여 착공 5년여 만인 지난 2016년 문을 열었다.

겉보기엔 다른 항구도시와 비슷해 보이는 여수의 밤 풍경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지난 2012년 세상에 나온 노래 ‘여수 밤바다’다. 여수 밤바다의 조명과 향기를 사랑하는 이에게 전해주고 싶고, 바닷가를 함께 걷고 싶다고 고백하는 이 노래가 큰 인기를 누리면서, 실제로 여수의 밤바다를 보기 위한 발길이 이어졌다. 산업의 도시 여수가 일약 ‘낭만의 도시’로 떠오르게 됐다.

기사 이미지
하멜 등대

하멜 등대와 야경을 즐기는 사람들. /허지윤 기자

여수엑스포역에서 걸어서 20분 정도면 동백꽃으로 유명한 섬인 오동도에 닿는다. 면적 0.12㎢에 불과한 이 섬은 여수 관광객이라면 한번쯤 들르는 명소다. 여기서 30여분 정도 차를 타고 돌산도 쪽으로 이동하면 해안가 절벽 위에 건립된 절인 향일암이 나온다. 지방문화재 제40호인 향일암은 한국의 4대 관음성지(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여수의 대표적 관광지

사진을 눌러서 확인해주세요
오동도 입구 전경. /허지윤 기자
오동도 풍경. /허지윤 기자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향일암에서 남해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허지윤 기자
항일암 풍경. /허지윤 기자
오동도에서 바라보는 여수 엑스포 전경. /허지윤 기자

일출과 일몰이 아름다운 장소로도 유명한 향일암은 최근에는 20~30대 젊은이들이 인증사진을 찍는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 빌보드 차트를 석권한 남성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의 리더 랩몬스터(RM)도 이곳을 찾았다.

전남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남긴 여수 엑스포

여수의 또 다른 랜드마크는 여수엑스포항과 여수항 사이에 조성된 여수 세계박람회장이다. 바다 위에 조성된 섬 같은 부지 위에 지어진 유선형 건물은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EXPO) 주제관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알파벳 오(O) 모양으로 생긴 대형 구조물인 ‘빅 오(Big O)’, 스카이타워 전망대 등 주변에 조성된 엑스포 시설물들은 현재 여수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기사 이미지
세계박람회의 흔적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EXPO) 주제관의 전경. /여수시청 제공

지난 1997년 세계박람회를 전남에 유치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지 15년 만에 개최된 여수 엑스포는 연안 개발과 보존, 새로운 자원 기술, 창의적 해양활동 등을 주제로 석 달 동안 개최됐다.

기사 이미지
2012년 5월 11일 여수 신항에서 진행된 ‘2012 여수 세계박람회’ 개막식. /조선일보DB

직접사업비 2조230억원, 사회간접자본(SOC) 조성비용 10조220억원 등 투자금액만 12조원대에 달한다. 전북 익산에서 여수를 잇는 180.3㎞의 전라선 복선전철 사업도 착공 11년 만인 2011년 10월 마무리됐다. 전 세계 104개국이 참가한 2012년 여수 엑스포의 관람객은 820만명이다.

이후 해마다 관광객 1000만명 시대를 이어온 여수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은 2020년에는 다소 위축된 분위기다. 지난 2019년 여수의 관광객 수는 1354만명이었다. 온라인 블로그에서 여수의 유명 포장마차나 식당을 이용하려고 몇 시간을 대기했다는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여수 관광객 추이

2020년은 1분기
자료: 여수시·여수상공회의소

2020년 가을에는 여수의 상권 침체가 우려스러울 정도로 한산한 가게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낭만포차거리도 예년 같지 않은 분위기다. 포차거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한 상인은 “올해 여름까지도 외지인 손님들이 제법 왔는데, 코로나19가 재확산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다시 발길이 끊겼다”고 말했다.

여수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여수 지역 경제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1분기(1~3월) 관광객은 174만1532명에 그쳤다. 2019년 4분기만 해도 347만3387명을 기록한 방문객 수가 절반으로 감소했다.

여수 한 호텔 관계자는 “원래 9월은 방문객이 많은 성수기이지만, 코로나19 사태로 투숙객이 거의 없다”고 했다.

홈으로 맨위로